변곡점

2011. 06. 14
초여름 날의 어떤 모습 @ 양평 오빈역
HTC HD2 mobile camera & retouched

초여름 날 양평에 다녀오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리고 문득 결혼을 하면 재미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실감나던 날.
히히히.


논문을 준비하는 시간

2011. 06. 14
<아이스테시스>와 논문 자료들 @ 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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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시각,
논문을 위해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굉장히 행복하면서도
두렵고
무서운 일.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과 회의를 매번 마주하는 시간들.


어떤 이에게

2011. 06. 11
반값 등록금 집회 @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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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등록금 집회가 정치 집회로 변질되간다는 어떤 우려가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반값등록금 문제는 이미 좁은 의미의 '정치'라는 의제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라고.
더욱이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정치라는 광장에 서있은지 오래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인큐베이터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하는
당신들의 탈정치적 시선 아니 그 무력화의 시도를 거두어주길 바라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2011. 06. 02
집으로 돌아가는 길 @ 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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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가게 일을 돕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나저나 요즘 세차를 하는 건 아무 의미없는 일. ㅠㅠ


새벽 아침

2011. 05. 22
새벽녘 @ 평창동
HTC HD2 mobile camera

아마도 나는 이런 빛,
이런 느낌을 좋아하나 보다.
물론 이 날의 기다림은 제법 짜증스러웠지만.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발췌 번역 보다는 의역....

0. Preface

창은 열림이며, 빛을 향한 노출이며, 환기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열리고 닫히며, 외부와 내부, 안과 밖, 전면과 후면을 나누어 놓는다. 창은 삼차원 세계를 향해 나아 있으며, 동시에 세계를 이차원으로 축약한다. 달리말해 창은 곧 스크린인 셈이다. 즉각적인 의미에서 스크린은 창과 같이 면과 프레임을 갖는다. (그것의 뷰를 제한하는 프레임과 틀을 가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스크린과 윈도우는 동일한 이미지라 하겠다.) 따라서 스크린을 새로운 의미에서 건축의 구성요소이자, 환기가 가능한 투과창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virtual windows로 부르는 한 편, 하나의 공간 구성의 물질적 토대와 우리의 시간적 공간적 개념을 치환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한다. 하나의 프레임, 하나의 스크린으로서. 따라서 우리는 영화와 TV와 컴퓨터 그리고 각종 움직이는 창들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물론 이 창들은 움직이는 이미지, 텍스트, 아이콘 그리고 3d 그래픽과 같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창이 무엇을 어떻게 담는가는 곧 세계가 어떻게 의미화 되는가에 또 다른 이름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

<원근법의 기원. 1995>에서 Hubert Damisch는 원근법의 담론이 오늘날 회화와 건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시대는 원근법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오히려 원근법이 발명된 15세기에 비해, 사진과 영화 그리고 비디오의 시대인 오늘날의 세계는 거의 원근법의 정확한 구조를 실현한 듯 보인다." 물론 이러한 통찰이 일견 옳아 보이기는 하나, 사실상 원근법적 이미지는 때론 관객을 완벽히 호명하지 못하며 이에 따른 연구는 정교하게 이뤄져야 한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

큐비즘적인 회화와 사진 그리고 건축과 같은 균열된 모더니즘은 탈원근법의 실천 전략에 영향을 미쳤으며 실험적 전위적 작업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흔적-다중촬영/ 이중인화등-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시도들은 컴퓨터 기계와 결합하며 새로운 시각적 인터페이스의 효과를 가져왔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

이러한 방식으로, 컴퓨터가 생성한 시각적 공간은 기존의 시각적 관습과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시각문화 전반에 걸친 공존은 계속되었다. -중략- 오늘날 컴퓨터에 의해 구현된 다중 스크린, 분할 화면은 이제 새로운 관습으로 고정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분절되고 나눠지며 동시적인 분할화면이 어떻게 시각적 공간적 감각으로 자리매김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은 이러한 분할화면을 커뮤니케이션 매트릭스에 있어서 단일한 원근법 체계가 붕괴했음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 지점으로서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효과들은 디지털 이전에도 존재했었다는 말을 다음 문단에서 나옵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3

건축공간의 창으로서의 프레임과 회화의 프레임 그리고 움직이는 스크린 이미지의 프레임은 모두 분리-존재론적 절단-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벽의 물질적인 표면과 창을 통패 보이는 풍경 이미지는 프레임에 의해 분리된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5

20세기에 들어서 영화는 후기영화(postcinema)가 보여주는 시각체계의 다원화에 기원으로서 작용하였다. (영화적인 의미에서) 스크린은 일상 속에 스며들었다. -중략- Wittgenstein의 예리한 지적처럼 ;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에 대한 한계이다.”, 멀티플한 시각적 프레임에 대한 한계는 곧 세계에 대한 한계로 작용한다. 역설적으로 광고와 TV쇼 그리고 수많은 분절된 스크린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곧 멀티플스크린의 익숙한 관람자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7

1. The Window

창은 원근법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증후적인 비유가 되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벽체에 붙어있는 실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관점을 창조하는 인식론적인 은유가 되기 때문이다.

2. The Frame

암실에서 벌이던 광학놀이에 기반을 둔 장치로서의 오랜 전통과 연관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순전히 관객의 즐거움을 위한 놀이인 만큼, 정확한 재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재현의 환상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0

과학에 의해 발견된 세계 그리고 화가들에 의해 밝혀진 세계 모두는 유리(거울/안경)-망원경, 현미경, 거울, 창 등-의 도움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 새로운 회화의 시대는 곧 이미지 세계로 향한 창의 사라짐에 불과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3

독일 예술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이용해 peep-box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상자 밖의 관람자가 만들어진 상자의 안을 들여다보게끔 하는 장치이기도 한데. peep-box는 복잡한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공간적인 재현을 상자 안에서 재현하는 한편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서가 아닌 단안의 시각적 결정을 이용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5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들은 삼차원 이미지를 이차원 평면 위에 전사하였는데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움직이는 이미지들이었다. 그리고 이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즉각적으로 그것의 기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흥미롭게도 가상의 움직임은 부동의 관람자에 의해 바라봐지게 되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6

카메라 옵스큐라를 놀이를 위한 기만과 위조로서 바라보고 있는 Della Porta의 설명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정밀함을 위한 과학장치가 아닌 놀이를 위한 환등장치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후 이 장치는 이동이 가능하게 되면서 매직 랜털이라는 장치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갖게 된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8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크레이의 주장은 매우 새로운 것으로, 장치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에서 관찰의 주체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로 옮겨온 최초의 방식인 셈이었다. 역사적 구성물이자 어떤 수행과 제도, 교육 그리고 주체화의 주체로서의 관찰자에 대한 크레이의 주목은 규범화된 장치 속에서의 주체적 지각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68

마르크스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중성-하나는 과학적 장치로서의, 또 다른 하나는 환영의 기구로서-을 발견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비가시적 작용을 가시화 하는 완벽한 예였다. 1845년은 사진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장치를 이용하여 자연세계를 완벽하게 그려낸 해이기도 하나. 동시에 매직 랜턴이라는 영사 장치가 (이 역시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조가 그대로 적용되었댜.) 대중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해이기도 하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71

바쟁은 영화의 창조자들에 관하여 그들은 영화를 완전하고 완벽한 실재의 표상으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바쟁은 회화에 대항하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진을 완벽한 리얼리즘으로 설명하며 그는 회화가 가진 유사의 열등감, 같음에 대한 열망 그리고 환상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고 말한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74

원근범과 사진을 설명하는 보드리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주장을 요약한다. 첫째는 원근법의 중심주의와 카메라 장치의 단원적 시각이 모두 하나의 관점을 취하도록 강요하며 관객의 다중적 시점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원근법과 사진 카메라는 모두 시각적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는 사실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75

보드웰은 장치이론에 대해 반박하며, 이론가들이 카메라를 어떤 중심 원근법을 복제하는 것만으로 바라본다면, 렌즈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 더욱이 렌즈의 길이가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시스템을 비과학적인 효과로서 대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82

보드리에 따르면 카메라 눈이라는 단 하나의 시점은 (연속적인 프레임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된다. 필름을 차이를 무화시키는 방향에서 살아있으며 통함을 시도하고 시점의 보존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의미화의 작용을 벌인다. 스테판 히스는 이러한 움직이는 시점을 설명하기 위해 나레이션의 역할을 부여하는데. 이는 의미의 연쇄로부터 벗어나려는 관람자들을 재중앙, 재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우리는 내러티브 필름에서조자 공간과 의미화는 두 개로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원근법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관점의 발생을 역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84

에디슨의 발명품 -키네토스코프-이 유행이 되면서, 영사방식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방식은 오늘날의 영화적 감상행위의 결정적 기원이 되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86

5. The Multiple

TV 앞의 시청자들은 몽타쥬의 달인들이다. 그들은 채널이 제공하는 내용들을 데이터베이스 삼아 다양한 형식과 다양한 이야기들을 마치 하나의 화면을 대체하는 듯이 편집하고 재배열한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92

GUI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는 한 개의 창 안에서 존재하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또 다른 창 안에서 존재하는 텍스트와 이미지와 동일한 스크린 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체계를 선사한다. 머어브리지의 멀티플이미지와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이 각자의 존재 위에서 일종의 연관성을 맺고 있다면, GUI를 기반으로 하는 컴퓨터 윈도우 창안에서는 그것들은 서로를 침해하고 방해하며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원근법이 인간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반영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파노프스키의 이론을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멀티플 이미지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분열적이고 복수적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한 할 지경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93-194

뵐플린은 두 개의 슬라이드 영사방식을 수업을 위해 베를린 대한에서 1901년 사용하였다. 그는 대조적인 두 개의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 두 이미지를 나란히 놓아놓고 비교하였는데. 보는 이들은 이를 통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비교와 대조를 할 수가 있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96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시스템들이 보여주는 바처럼, 당시로서는 어떤 방식이 주도적인 형식이 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중략- 그럼에도 하나의 스크린 위에 하나의 이미지를 쏘는 방식은 대다수의 문화적인 관습으로 자리잡았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96-197

에드윈 포터의 <the twentieth century tremp>와 <the dream of a rarebit friend>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분할화면은 두 개의 화면은 균일하게 촬영하는 방식을 이용해 관람자들의 환상세계를 시각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198

루이스 웨버와 필립 스몰리의 영화 <suspense>에서 볼 수 있듯이, 서스펜스는 나누어 놓은 직각의 형태로부터 발생한다. 분할화면은 심도의 깊이 주었던 재현의 원근법에 대해 대조의 효과를 가져온다. -중략- 맥루한에 따르면 영화가 포기했던 동시성을 혹득하면서도 그 긴장을 가져온 셈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00-201

멀티플 이미지의 종류

-1. 분할 화면 (스크린 내에 분할화면)

-2. 프레임 안의 프레임

-3. 영사방식의 복수화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02

워홀의 이중 스크린 프로젝트는 검열되지 않은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더욱이 영사방식의 형식을 시도함으로서 단 하나의 스크린에 영사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더블 스크린 프로젝션은 시각 예술장르에서 넓게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형식과 분석적인 비교를 위한 장치들로 이용되었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09

맥루한은 “새로운 미디어의 효과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요인은 우리가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내재된 단일원근법적 시선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 시대의 방법이란 단 하나가 아닌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모델을 이용해보는 것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10

성찰로 가득한 고다르의 numero deux는 모든 쇼트와 그것의 조합이 앤대 워홀의 첼시 걸에서 보았던 것처럼 임의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이 철저히 조합과 기계적인 행위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다르가 스크린을 삽입함으로서 멀티플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단하나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찍고 있는 또 다른 필름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16

관객들이 마이크 피기스의 영화 <time code>를 보았을 때, 아마도 하나의 이미지만을 쫒았을 것이라는 가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크린 상의 모든 이미지들을 동시적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능력은 네 개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던 셈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18

유저는 컴퓨터의 조정자로서 거의 몰입 없이 조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컴퓨터와 전문가 사용자 사이에는 또한 성찰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21

stepheson은 결국 맥과 윈도우 체제 둘 다 모두 헐리웃 고전 영화와 닮아 있다라고 말한다. 둘은 모두 동작을 뒤로 감춘 채 비 성찰적인 환영을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 리눅스는 독립 아방가르드 영화와 닮아 있는데 그것은 자기 성찰적이며 물질적이며 정확한 운영체제를 밖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30-231

알베르티에게 있어 윈도우의 은유란 직접적이고 수직적이며 중계되지 않은 시선 그리고 투명한 창을 의미했다. 그러나 컴퓨터의 윈도우란 사실상 그 반대에 서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컴퓨터의 시각 장은 직접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소프트웨어라는 고도로 상징화된 중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가적인 심도의 창을 지니고 있으며, 이미지와 텍스트를 동시에. 그리고 움직이는 이미지와 정지된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갖을 수 있다. 어떤 윈도우는 네트워크를 향해 얼려있기도 하지만 어떤 윈도우는 하드디스크라는 그 자체를 향해 작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컴퓨터의 윈도우란 과거 미술사에서 볼 수 있었던 대조와 비교를 위한 두 개의 창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하겠다.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31

벤야민이 말하는 ‘분열된 상태에서의 인식’은 오늘날의 멀티태스킹 컴퓨터 이용자를 위한 좋은 모델이지 않을까?

- Anne Friedberg. <virtual window>. p.232


<디지털 시대의 영화>. 토마스 엘세서 / 케이 호프만 엮음

탐구 정신과 진취적인 독립성 때문에 유명했던 뤼미에르 형제는 정확히 그들의 시네마토그래프와, 그것을 위해 만들었던 영화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발명이 갖는 이중적인 유산, 말하자면 영화가 선택했던 허구적인 측면과 다큐멘터리적인 측면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두셰나 다른 많은 시네필들을 열광케 한 '새로운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만해준다. 혹은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달리해보자, 우리가 뤼미에르적인 것을 아마도 그들이 알지 못했을 개념인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으로 말할 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어떤 모순이고 역설이며 딜레마인가?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66

단순히 새로운 테크놀로지만 고려한다 해도, 영화의 발명은 '도구들'의 목록표에 새로운 것이 덧붙여지는 과정만 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이런 실천으로 인해 커다란 영향을 받은 더 거대한 환경을 재구조화한다. 그것은 장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그러한 장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념을 바꾸며, 늘 거기에 있었지만 결코 문제시되지는 않았던 분명한 연결을 만든다.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69

예컨대, 에드워드 머브리지는 필라델피아 철강공의 생산 현장에 있는 조립 공정 라인을 합리화하기 위해 크로노포토그래피에 관한 연구를 사용했다. 또한 19세기에는 분할, 재결합, 조립 가능한 실체로서의 시간을 경제적으로 탐구하고 관리하려는 압력이 있었다. 인간 신체가 공장 생산 과정의 표준화된 시간에 적응해야 하고, 기계의 작동에 일치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영화를 뒷받침해준 것은 크로노포토그래퍼와 같은 테크놀로지였다. 이런 테크놀로지를 사회와 산업에 적용한 것이 문화적인 불쾌감을 초래한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이런 불쾌감을 구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만들어 낸 테크놀로지 자체가 자신이 만들어 낸 질병을 구제하는 체했던 것이다.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70

역사에 관한 이런 반사실적인 개념은 '실제' 역사, 즉,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 (설사 내가 레오폴드 랑케 Leopold Ranke에게로 되돌아가려 할지라도) 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모든 역사를 고려해 보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 역사들에서는 산 자를 유령들이 가리며 영화와 다르지 않게 '죽지 않는 자들'로 그 공간을 메운다. 노동자들은 영원히 공장을 나서고, 대표자는 영원히 노빌 쉬르 쇤느 Neuville-sur-Saone에 도착하는 중이며, 아기는 영원히 아침 식사로 포리지를 먹는다.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71

뤼미에르는 원근법과 단일한 소실점 (고전적인 이미지의 지표)이라는 법칙에 따라 이미지를 구성하지 않고, 상이한 논리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각을 분리시키고, 시각의 차이를 통한 시각 parallax vision을 사용했고, 평면적이면서 동시에 심도감이 있고, 통일되면서도 분할되어 있고, 상이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집중되어 있는 두 층위나 세 층위의 이미지를 눈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눈이 이미지를 스캐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하는 꽤 놀랄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흥미와 매혹의 관점이 중식됨을, 그리고 그것이 회화적으로 훈련된 단안 원근법에서 눈을 벗어나게함을 알 수 있다.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86

영화에서 환영주의의 승리는 그래서 단지 실증주의적인 역사의 흔적 일 뿐이다. 그 역사 뒤에는 많은 가상 역사가 숨어 있다. 환영주의를 통해 루이 뤼미에르를 그 영화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영화의 첫번째 우두머리로 상징화하는 것은 그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발생시킬 수 있는 - 그러나 필연적인 것은 아닌- 환영주의를 통해 가능한 보기를 검토하고, 그 자신의 영화에 그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에게서 기대했던 상세함과 정밀함을 제공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역사 속에 잠재한 그가 추구한 독특하고 개인적인 의제들을 따라가야하는 것이다. 
- <디지털 시대의 영화> :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츄얼리스트. 토마스 엘세서. p.88  

크리스티앙 메츠의 <상상적 기표 - 영화. 정신분석. 기호학>

제 1부 상상적 기표

영화에 관한 담론은 꿈이 된다. 해석되지 않은 꿈. 이 점이 바로 이 꿈의 징후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꿈은 이미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이 부분이 또한 그것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꿈은 말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영화의 앎은 가치를 고려하기와 회복하기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토착 담론의 '되풀이'를 통해 전달된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34

픽션 영화는 기표를 부인(기표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하려는 시도)하는 현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기표의 기능 작동과 관련이 있는 일종의 체제를 드러내고 있다. 정확히 하면 이 체제는 기표를 잊게 하려는 의도로 고안된 것이다. (사실 영화가 시나리오 한 가지 요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음으로써 영화 존재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픽션 영화들을 변별하는 작업은, 기표의 고유한 임무가 '부재'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 형태에 근거를 두는 현전 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72

공연 예술에서는 픽션의 문제라기보다는 기표를 정의하는 자질과 관련되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픽션 혹은 논픽션을 재현하는 연극 작품에서, 그 '연기 행위'는, 충실히 모방하려는 의도에서, 실제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실제 배우(즉 인간)에 의해 행해진다. 물론 이때 '관객은 같은 무대'에 있다. 반면 (환상에 더 근접해 있는) 영화 스크린이라는 '다른 무대'는. 일반적으로 무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연극처럼 그 내용이 허구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재현 그 자체는 완전히 허구적이다. 배우, 무대장치, 언어 등은 모두 부재한다. -중략- 이 흔적은 바로 기표 그 자체이고, 녹화된 전체, 다시말해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거대한 풍경과 전열이 정비된 전쟁터, 네바 강의 해빙, 삶의 유유한 흐름등을 품고 있는 작은 필름 묶음, 그 내면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부재하리라고 믿게 만드는 겸손한 크기로, 둥근 강철 통 안에 돌돌 말려 있는 기표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76

영화가 다른 예술보다 '더 많은 감각'을 자극한다고 볼 때 그 숫자와 다양성 대신 감각의 지위를 생각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다른 예술보다 '덜 지각적'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감각은 모두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니 (영화가 환상은 아니기에) 지각 활동 자체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지각된 것은 현실적으로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 상(像), 그 환영, 그 '복제'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77-78

영화 관객이 스크린에서 부재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 오히려 관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해되는 영화 전개가 가능한 이유는) 관객이 이미 거울 단계를 거쳤다는 경험에 있다. 따라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대상의 세계를 구성할 능력을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이미 상징계의 영역에 속한다. 관객은 대상들이 존재하고, 자신은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 역시 타자에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닮은꼴을 알고, 스스로를 알아본다. 더 이상 주체의 유사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 유아기에 거울에 비친 것처럼, 스크린에 묘사될 필요가 없다. '2차'라고 지칭될 만한 다른 모든 행위처럼 영화에서의 실행도 자아/비자아의 원초적인 미분화 상태를 넘어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79

지각된 것은 온전히 대상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고, 그 어떤 것도 관객 자신의 이미지에 대항 하지 않으며, 지각된 것과 주체(타자와 나)의 특별한 혼대 (이를 통해서만 타자와 나의 구별이 가능해지는)에 상응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스크린에 존재하는 것은 늘 타자이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지각되는 것 어떤 부분에도 속하지 않고, 오히려 '전지적 지각 주체'가 된다. 전지적이라고 하는, 다시 말해 영화가 관객을 전능하게 만드는 '편재성,' 어디에서 무엇이든지 볼 수 있는 힘, 나는 온전히 지각 주체에만 속하기 때문에 더욱 전지적인, 스크린에는 부재하지만 영화관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면서 위대한 눈과 귀를 지닌 주체, 그것 없이는 스크린에서 인지되는 대상이 지각되기 위해 그 누구도 갖지 못할 것이기에, 결국 '영화 기표를 구성하는 심급'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82

요컨대 관객은 그 '자신에게 동일시하는 것이며,' (경고, 경계와 같은) 순수 지각 행위로서의 자신에게, 지각된다는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 이전의 선험적 주체로서의 자신에게 동일시하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방식이 다른 의미 작용 장치에서는 동일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직설적인, 동시에 어극난 결과를 낳으면서 자신의 궤적을 그린다는 점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83

모든 응시는 외부로의 투사 (유유히 움직이는 등대 불빛처럼)와 내면으로의 투사라는 이중적인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카메라는 총포처럼 대상에 '응시를 집중'시키고 (외부로의 투사), 대상은 필름 표면에 그 흔적을, 그 지문을 남기러 온다. (내면으로의 투사). 관객은 그 스스로의 기계의 일부 장치이기 때문에 이 중요한 이 측면을 벗어날 수 없다. -중략- 영화는 내가 흡수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가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계를 작동시키는 주체인 나를 영사기라고 하겠으며, 영화를 수용하는 주체인 나는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가지 형태에서 나는 빛을 쏘는 카메라이자 빛을 저장하는 기록 장치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86

비록 자아가 이미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아는 그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상적 형태에 근거를 두고 지속적으로 착각이라는 형상에 매여 있다. 2차 과정은 1차 과정을 (항상 모두 밀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뒤덮게 할' 뿐이다. 이때에도 1차 과정은 항구적으로 현전하면서 자신을 뒤덮는 2차 과정의 가능성을 조건짓는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86-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지 않은 앵글이 그 희귀성 때문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즉 카메라에 동일시, 나아가 '작가의 시점'에 동일시를 더 잘 느끼게 한다는 다소 부정확한 정의에는 공감한다. 왜냐하면 익숙한 앵글과 프레임 잡기는 마치 화면에 피사테 위치를 설정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반면 평범하지 않은 앵글은 나를 깨어나게 하고 (마치 정신분석 치료처럼)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일깨우도록 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앵글은, 그 등장과 함께 내 응시가 스크린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중지시키고, 주어진 정확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를 강요한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90-91

훔쳐보는 자가 속한 어둠, 필연적으로 자물쇠 구멍 효과를 내는 스크린이라는 빛들이 창과 같은 영화 체제의 몇몇 특성은 관음증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며, 게다가 영화 관객이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그 관련성을 더욱 배가시킨다. 오히려 그 외관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영화 관객은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소설 독자라는 분열된 통합체와 더 닮아 있다. 영화 스펙터클은, 응시 대상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연극 스펙터클이 극단적일 수 있는 형태, 좀더 극단적으로, 자신의 관객을 모른다. 무대와 극장은 동일한 공간에서 기능하는 양극(兩極)일 수가 없는데, 스크린이 재현하는 영화 공간을 기능적으로 이형태로서, 극장의 공간과 소통하지 않는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03

연극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재현물은 그 정의상 상상적이다. 이는 바로 허구를, 그가 사용하는 기표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허구로 특징짓는 부분이다. 반면 연극에서 재현 자체는 매우 현실적이고, 영화에서는 재료자체가 이미 상(像)이라는 특성 때문에 매우 상상적이라고 하겠다. 연극적인 허구는 실제적으로는 비현실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실적인 행위들의 총체로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에 반해 영화적 허구는 비현실의 거의 사실적인 현전처럼 인식된다. 이미 기표의 존재 방식 자체로서 허구적이기에, 그 고유한 물질성은 중요한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디제시스에 기대어, 더 완벽하게 허구에 삼켜지고자, 관객의 믿음을 근거로 전복되고자 한다. 이때 균형 중심점은 재현물에 약간 더 가깝게, 재현에는 좀더 멀게 자리 잡는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07

욕망되는 육체, 욕망의 육체와의 관계 속에서 페티시는, 영화의 기술 장비가 영화 전체와 맺는 관계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페티시, 테크닉 수행으로서의 영화, 일종의 영중적인 일. '수훈'으로서의 영화. 모든 장치가 근거하는 결여를 주목하고 이를 강조하는 쾌거, 동시에 이 부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쾌거로서의 영화. 영화 페티시스트는 기계가 해낼 수 있는 영역 앞에서, '그림자 극' 자체를 두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자라고 하겠다. 영화적 주이상스의 권력이 완벽하게 작동하려면, 영화 페티시스트는 매 순간 (특히 동시에) 영화 한 편이 소유하고 있는 현전의 힘에 관해, 그리고 그 힘이 구축된 근거가 되는 부재에 관해 사유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그는 사용된 테크닉 수단들과 그 결과를 비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 둘의 간격 사이에 영화 페티시스트의 쾌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16-117

제 2부 스토리/담화

전통적 형식의 영화는, 에밀 방브니스트 용어를 따르면, 담화discourse가 아닌 스토리storie처럼 주어진다. 물론 그 영화의 감독 의도를 생각한다거나, 대중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사유한다면 담화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전통적 영화라는 담론이 효과적으로 소통되기 위해서, 그 스스로 선택하는 원리는 언표 상황의 흔적들을 지우고, 스토리처럼 변장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토리의 시간은 항상 '완료된' 것이다. 전적인 서사 영화는 그의 다른 면모를 고민하게 하는 결여, 모색을 부정하고, 만족되고 완성된 얼굴만을 내세운다. 공식화될 수 없는 희망을 공식화, 문법화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28

영화 상영 동안, 관객은 배우와 함께 있으나, 배우는 관객들 사이에 부재한다. 촬영장에서 배우가 현전하는 사이 부재하는 것은 관객이다. 이렇게 영화는 노출을 즐기는 자이자 동시에 감추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는 방법을 터득한다. 응시하기와 응시되기의 교환은 그 본질에서, 중심에서 균열을 일으켜, 두 가지 측면으로 갈라지는데, 이때 시간적 차이, 다른 종류의 분열이 발생한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32

영화 체제는 관객을 움직이지 않은 채 침묵하게 만들면서, '감춰놓는다.' 관객은 지속적으로 운동 기능성은 저하된 반면, 감각기능은 고조된 상태에 있고, 소외되지만 행복한, 응시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곡예하듯이 매달린다. 그는 응시 그 자체에만 집중한 나머지 기진맥진해진 마지막 순간에 주체로서 자신 스스로에게 역설적인 동일시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관객의 동일시는 영화의 등장인물을 향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동일시는 2차적), 그의  동일시는 (보이지 않는) 보는 심급에 선결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영화를 담화로서, 스토리를 배열하는, 스토리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심급으로서의 영화에 앞서는 것이다. 전통적 기법의 영화가 언표 상황의 주체를 드러내는 모든 흔적을 삭제하고자 하는 이유는, 관객이 바로 그 주체라는 반응을 위해서이다. 주체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모든 내용은 응시되는 쪽에 있기에, 볼 수 있는 순수 능력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34

제 3부 픽션 영화와 관객

영화는 주체가 자신의 방식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진짜 지각에 근거한다. 외부로부터 주체가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이미지와 소리에 근거한다. 반면 꿈은 더 정확하게 더 반듯하게 욕망에 대답한다. 물질적인 측면이 없기 때문에 꿈은 현실에 결코 부딪힐 염려가 없다 (현실은 역시 타자의 환상이기도 하다). 꿈은 마치 동일한 욕망, 동일한 공포를 지난 주체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된' 영화와 같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흐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다른 생산물보다 훨씬 더 꿈의 흐름을 닮은 것이 사실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영화적 흐름은 깨어 있는 최소 상태에서 수용된다. (음향이 수반된 이미지, 움직임을 재현하는 이미지인) 영화의 고유 기표는 꿈과 일련의 연관관계를 부여하는데, 즉 꿈의 기표가 갖는 주요 특성 중의 하나인 (프로이트의 개념을 따라서) '형상화하여 표현하기,' 상형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이미지는 서로 연결된 형상들로 체계화될 수 있고, 이는 언어가 구조화되는 논리만큼 (언어학에서 영감을 얻은 고전 기호학을 생각해보자) 2차 과정의 성격을 ㅈ띠고 있다. -중략- 하지만 리오타르가 주장한 바대로, 이미지가 논리적인 접합 속에 통째로 삼켜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미지 내부의 어떤 것은 이 논리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68 

영화에서 비교적 1차 과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형태들이 등장했을 때, 일반적으로 관객이 놀라거나 혼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이 형태들이 나타나자마자 서사라는 2차적 논리를 딸 해석하려고 들지만,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이 형태들은 사람들에게서 더 즉각적이고, 더 심층적이고, 더 보편적인 거부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기과한 구석을 그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 이 경우 거부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할 것이다. 분명한 항의, 다가치적인 방어와 보호의 형태로서의 웃음, 영화에 대항하여 내면적으로 행하는 공격, 혹은 반대로 우울 증상이 있는 자에게서는 극도의 당황스러움, 강력한 모순 인상 등. 이 반응들은 모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경우이지만,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규칙이 없으며, 실제 이러한 반응을 겪을 때라도, 이는 영화의 환살적인 내용에 반응하는 것이지, 영화 속에서 1차 과정에서 잔재한 것 그 자체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아시말해 내용에 더 쏠리는 작용들인 것이다. 허구 체제 안에서 이 반응들의 고유성은 사실 그 스스로를 없애고 디제시스의 힘에 내맡기는 데 있다.(영화 '특수 효과 trucage'와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71-172 

의식적 환상은, 그 발현 혹은 발현 중 몇몇 형태가 의식에 접근할지라도, 무의식 시스템에 훨씬 더 많이 속해 있다. 왜냐하면 의식적 환상이 주제적으로 충동의 표상 대표자-표상representant-representation에 가깝고, 에너지 차원에서 충동의 표상 대표자-정동representant-affect에 가깝기 때문이다. -중략-의식적 환상은 단지 다소 관계가 먼 형태, 무의식적 환상의 파생물인 반면, 다른 측면에서 (침수되어 전혀 더오르지 않는 범주까지도) 환상은 비교적 명확하게 전의식의 흔적을 항상 자신의 '구성'방식과 형태적 배열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가 환상에서 일종의 하이브리드hybrid를 본 것이리라.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76-177

꿈꾸는 주체는 지각한다고 믿는다. 꿈에서 영화적 상태로 이동하면서, 그는 잃어버린 자가 된다. 그것도 이중으로, 이미지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으며, 또한 그 이미지를 믿는 정도도 약화된다. 객관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꿈에서보다 덜 믿게 된다. 사실 꿈 이미지는 진정한 환영을 가능케 하는 수준까지 힘을 지닐 수 있고, 욕망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는 꿈보다 두 배나 항위 수준에 있다. 영화는 낯설며, 덜 진짜처럼 느껴진다.
- <상상적 기표 : 영화.정신분석.기호학>. p.182`


뉴 미디어의 언어 - 레프 마노비치

파노라마, 시각놀이 기구, 핍쇼 같은 앞선 문화 형식들로부터 어떻게 영화가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실을 애써 재구성해 놓고도, 어째서 컴퓨터 미디어의 언어가 나타났을 당시, 다시 말해 아직 일관된 언어로 고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 문화 형식의 요소들이 분명하게 관찰되고 인식될 수 있을 때 컴퓨터 언어의 가계도가 작성되지 않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ㅡ <뉴미디어의 언어>. p.46

'뉴미디어의 원리'들로는 그것의 발전을 구성하고 있는 데 가지 핵심적인 경향, 즉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 부호 변환(transxcoding)을 설명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뉴미디어 언어의 발전을 형성해온 논리를 이해한다면 다른 대안적인 것들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아방가르드 영화제작자들이 영화의 특정 내러티브 시청각 체제에 대한적인 것을 적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방가르드 뉴미디어 아티스트들이 해야 할 바는 역시 기존의 컴퓨터 미디어 언어에 대안을 적용하는 일이다.
- <뉴미디어의 언어>. p.50

수적재현:
필름은 인간 존재의 연속된 시간을 분절된 프레임으로 추출한다. 회화는 시각적 현실을 분절된 선으로 추출한다. 인화된 사진은 분절된 점으로 시각적 현실을 추출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진은 어떤 분명한 단위를 갖고 있지 않다. 현대 미디어의 분절된 단위들이 형태소와 같은 방식의 의미 단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필름의 프레임이나 망점은 필름이나 사진이 보는 이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미디어의 질료 단위를 종종 의미의 단위로 만드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폴 샤리츠의 영화 같은 현대 예술과 아방가르드 영화는 예외가 될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 P.72

상호작용을 통해 변하지 않는 핵심 부분, 구조 그리고 원형이 존재하는 한, 개방적 상호작용은 가변성 원리의 부분집합으로 새악될 수 있다. 여기서 이후에 인지심리학자들에 의해 원형 이론으로 발전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이론'이 유용한 유비가 될 수 있다. 가족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다른 사람이 지닌 특징을 다 갖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족 구성원은 어느 정도의 특징을 공유한다. 이와 유사하게 원형 이론에 따르면, 자연어에서는 많은 단어의 의미가 논적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원형에 근접하는 것에 의해서 주어진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85

기호학적 의미에서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여러 미디어에서 문화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부호의 역할을 한다. 인터넷을 사용할 때, 우리가 접속하는 모든 것, 즉 첵스트, 음악, 비디오, 내비게이션 공간 등은 브라우저의 인터페이스를 통과해서 다시 OS의 인터페이스를 통과한다. 문화적인 커뮤닡케이션에서 부호가 그저 중립적인던달기재이기만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부호는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에 영향을 준다. 예를들어, 부호는 어떤 메시지를 더 잘 이해되게 하고 다른 것들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게 만든다. 부호는 그것만의 게계관이나 논리 체계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이 부호로 만들어진 문화적 메시지나 전체 언어는 그 부호가 수반하는 세계관, 체계, 이델올로기에 의해 제약된다. 대부분의 현대 문화이론은 내가 '부호의 반투명성 (non-transparency of the code)'이라 부르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에 인기를 끌었던 워프-사피르(whorf-sapir)가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는 자연언어의 부호에 의해 결정되며, 다른 자연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는 세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12-113

인터페이스가 그 자체의 논리를 미디어에 적용시키는 방식의 예로서, 근래 GUI로 작동되는 모든 소프트웨어의 기본 사양인 '잘래내서 붙이기' 오퍼레이션을 고려해보자, 이는 공간적인 미디어와 시간적인 미디어 사이의 전통적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용자는 이미지, 공간의 일부, 시간적 작업의 부분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잘라내고 붙이기 때문이다. 이는 크기에 대한 전통적 차이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사용자는 하나의 픽셀,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디지털 영화 전체를 같은 방식으로 자르고 붙일 수 있다. 끝으로 이것은 미디어 간의 전통적 차이 역시 무의미하게 만든다. '잘라내서 붙이기'는 텍스트, 스틸 이미지, 동영상, 사운드 그리고 3차원 객체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13-114

1980년대에 많은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효과 중의 하나를 공간화의 효과로 규정한 바 있다. 시간보다 공간을 특권화하고 역사적 시간을 평면화하고 거대서사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에 발전된 컴퓨터 미디어는 이러한 공간화를 문자 그대로 성취했다. 연속적인 저장은 무작위적 접근이 가능한 저장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 , 정보의 위계적 구성은 평면화된 하이퍼텍스트로 바뀌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27

영화가 태어난 지100년이 지난 지금, 영화의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시간을 구조화하며 이야기를 서사화하며 경험과 경험을 연결하는 것은 컴퓨터 사용자가 모든 문화적 데이터에 접속하고 상화작용하는 기본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시각적 에스페란토어가 되겠다던 영화의 약속, 그리피스(Griffith)에서 베르토프(vertov)에 이르는 1920년대의 수맣은 영화 예술가와 비평가가 집착하던 목적이 컴퓨터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 중략- 사용자들은 새로운 문화적 언어를 받아들일 능혁이 있는데, 100년전 영화든, 아니면 오늘날의 문화 인터페이스이든 그 언어들이 과거의 이미 익숙한 문화적 형식들이 기여했다. 문화 인터페이스 역시 영화와 인쇄물 같은 더 오래된 문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28-129

문화 인터페이스에서 꾸준하게 등장하고 있는 영화적 지각의 또 하나의 국면은 재현된 현실이 직사각형의 틀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는 이러한 틀을 서구 회화에서 물려받았다. 르네상스 이후 틀은 틀 밖으로 확장될 수 있는 더 큰 공간으로서의 창으로 여겨졌다. 이 공간은 틀의 직사각형에 의해 두 개의 부분, 틀 안의 부분인 '스크린 상의 공간'과 틀의 밖에 있는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유명한 공식화에서 틀은 세계를 향해 있는 창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프랑스 영화이론가 자크 오몽과 그의 공저자들이 최근에 공식화한 것에서처럼 "스크린상의 공간은 더 광활한 원근법적 공간 안에 포함된 것으로, 습관적으로 지각된다. 비록 보이는 건 스크린뿐이지만 더 큰 풍경이 그 주위에 펼쳐진 것으로 여겨진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30

뉴미디어에 대한 주요 연구서인 <재매개>에서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은 미디어를 "재매체화(remediate)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모든 미디어의 본질적 특성을 정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더니스트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볼터와 그루신은 모든 미디어는 "재매체화", 즉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다른 미디어를 번역, 개조 그리고 수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를 다른 미디어로 생각한다면, 그 역사와 현재의 발전은 분명히 앞의 명제에 맞아 들어간다. 인간-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역사는 인쇄물,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과거, 현재의 다른 미디어를 차용하고 재형식화하는, 뉴미디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재포맷해온 역사다. 그러나 HCI 디자이너들은 대부분의 다른 미디어의 '규범'을 빌려오고 그것을 절충적으로 결합시킨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40

스크린의 개념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회화규범을 결합하고 있다. 이 중 하나는 스크린이 가상 공간으로서 열린 창의 역할을 하는, 즉 감상자가 작동할 수는 없지만 들여다볼 수는 있는 회화적 환영이라는 오랜 서구 전통이다. 또 하나는 컴퓨터 화면을 명확히 기능이 규정되어 있는 일단의 제어 단추로 나누고 그 결과 본질적으로는 스크린을 가상도구판으로 취급하는 그래픽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라는 최근의 규범이다. 결과적으로 컴퓨터 화면은 복수의 양립 불가능한 정의, 즉 깊이와 표면, 불튜명성과 투명성, 환영적 공간으로서의 이미지와 행위의 도구로서의 이미지가 투쟁을 벌이는 장이 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41

크기 비율마저도 지난 5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16세기 회화에서나 영화 스크린에서나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에서나 크기 비율은 비슷하다. 이러한 특면에서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두 가지 주요 형식의 이름이 회화의 두 장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평 형식은 '풍경화 양식'으로 불리고, 수직 형식은 '초상화 양식'으로 불린다. -중략- 역동적 스크린은 이미지와 관객 사이의 어떤 관계성, 말하자면 특정한 관람 통제를 들여온다. 이러한 관계성은 전통적 스크린에도 암묵적으로 존재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스크린의 이미지는 완전한 환상과 시각적 충만함을 추구하는 한편, 관객은 의심하지 않고 이미지에 몰입하도록 한다. 현실 송의 스크린은 관객의 물리적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제한된 차원의 창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관객은 그것 밖의 물리적 공간을 무시하고 자신이 이 창 안에서 보고있는 것에 전적으로 집중한다. 이러한 관람 통제는 그림이든 영화 스크린이든 혹은 텔레비전 스크린이든 하나의 이미지가 스크린 전체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화관에서 영사된 이미지가 스크린의 테두리와 정확히 밎지 않을 때 우리는 화를 내곤 한다. 맞지 않은 테두리는 환상을 방해해서 그 재현된 것의 밖에 있는 것을 의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46-147

19세기 말, 영화의 역동적 스크린은 사진 이미지의 고정된 세계를 깨뜨렸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시각성에 새로이 부여된 역동성에 대한 그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선술집, 대도시, 사무실, 방, 기차역, 공장 안에 절망한 채 갇혀있었다. 영화가 등장하고 1초에 10번이라는 놀라운 폭발력으로 이 감옥 세계가 두 동강으로 깨어졌을 때, 산산이 부서진 폐허와 파편의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대담하게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영화 스크린은 관람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다른 공간을 여행할 수 있도록 했다. 영화 역사가인 앤 프리드버그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움직이는 가상의 시선(a mobilized virtual gaze)"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가상적 운동성은 새롭게 제도화된 관객의 부동성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전 세계에 수백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감방, 즉 영화관이 지어졌다. 수감자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다. 그들이 가상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그들의 신체는 집단적 카메라 옵스큐라의 어둠 속에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어야 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58-159

'원시적' 시기에는 영화관의 공간과 스크린 공간은 연극 극장이나 쇼 극장과 흡사하게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 관람객은 자유롭게 상호작용하고 오고갈 수 있었으며, 영화적 서사의 가상 세계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고전영화는 개별 관람객을 분리된 개인으로 간주하고 그를 가상 세계의 서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1913년 한 당대인이 기술했듯이 "(관객은) 연극의 각 단계에서 '엿보는 구멍'이 되어야 한다. "원시적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허공 너머에 있는 별개의 공간을 보도록 한 반면, 고전영화는 가상 공간 안에서 개별 장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관찰 위치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중략- 컴퓨터 그래픽의 현대적 어휘를 사용해 말한다면, 우리는 가상 세계가 회전하거나, 늘어나거나/짜부라지거나, 확대/축소되어서 관객들에게 항상 최상의 관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스트립 댄서처럼, 공간은 천천히 자신을 드러내고 빙 돌고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상대를 자극하며 다가섰다가 물러서고 그러면서도 항상 감추어진 여지를 남김으로써 관객이 다음 장면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유혹적인 춤을 기다리게 한다. 관객이 할 일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뿐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59

회화는 그림과 관객이 위치해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부터 확실히 떨어져있는 가상 공간을 표현한다. 동시에 그림은 원근법적 모델 또는 다른 시술로써 관객을 감극ㅁ해서, 관객과 그림이 하나의 체계를 형헝하게 한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 전통에서는 관객이 일관된 단일 공간, 즉 그것을 구성하는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 안에 존재한다면, 재현 전통에서는 관객이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즉, 관객은 물리적 공간과 재현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주관의 이러한 분열은 이미지가 위치하는 물리적 공강을 모방하지 않고 어느 임의의 공간이라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새로이 획득한 이동 가능성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64

요약하자면 상업적으로 배포된 기존 미디어 요소들로부터 미디어 객체를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미디어에서도 있는 일이었으나, 뉴미디어 기술은 그것을 더욱 표준화하고 더 수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가위와 풀 대신 이제 '오려두기'와 '붙이기'를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또 뉴미디어는 창작이나 편집 소프트웨어의 인터페이스 안에 선택이나 조합의 오퍼레이션을 기화화함으로써 그런 오퍼레이션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데이터베이스와 자료집으로부터 요소를 끌어오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 되면서, 요소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 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84

1920년대 아방가르드에서 1980년대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몽타주는 컴퓨터 문화에서는 더 이상 주도적인 미학이 아니다. 다양한 공간이 봉합의 흔적이 없는 하나의 가상 공간으로 혼합되는 디지털 합성은 연속성이라는 대안 미학의 좋은 예이다. 더구나 합성은 일반적으로 몽타주 미학의 대안으로 이해되고 있다. 몽타주는 여러 요소 간의 시각적, 스타일적, 의미론적, 감정적 불일치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에 합성은 봉합의 흔적이 없는 전체, 하나의 게슈탈트(Gestalt)로 요소를 섞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미 나는 DJ를 '선택에 의해 창작하는' 대표적인 예로 든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반몽타주적 연속성의 미학이 어떻게 문화 전반을 통괄하고 있으며, 컴퓨터로 만들어진 정지화면이나 동영상 그리고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지를 이 예를 통해 보이고자 한다. DJ의 기술은 하나의 트랙에서 다음 트랙으로 봉합의 흔적을 보이지 않고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수한 DJ는 작곡가이며 동시에 반몽타주 예술의 대표자다. 그는 매우 다른 음악적 레이어로부터 완벽한 시간적 흐름을 창조할 뿐 아니라 이를 춤추는 군중 바로 앞에서 실시간으로 해낸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199

합성을 위한 기술의 발전은 1907년과 1917년 사이, 미구 영화가 소위 초기 영화에서 고전영화 양식으로 변화한 것과 일치한다. 고전영화 시기 이전에, 극장 공간과 스크린 공간을 극장이나 소극장처럼 명확히 분리되어 있었다. 관객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영화적 서사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의 재현 시스템은 대면적이었다. 즉, 배우들은 관객을 향해 엄격히 정면을 향하고 연기했으며, 장면의 구성 역시 대면성을 강조했다. 그와는 대조적ㅇ로, 이미 언급한 바처럼 고전 할리우드 영화는 각각의 관객이 허구적 서사 공간 속에 놓이게 만든다. 관객은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경험할 것을 요청받는다. 따라서 공간은 더 이사 연극적 배경의 구실을 하지 않난다. 대신 새로운 합성 원리, 연출, 세트 디자인, 딥 포커스 촬영법, 조명 그리고 카메라 이동 덕분에 관객은 최적의 시점에서 각 장면을 보게 된다. 관객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 '있게'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01-202

이와 대조적으로 한 장면 내의 몽타주는 영화사를 통틀어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기술의 예로는 1903년 에드워드 포터(Edward Poter) 감독의 영화 <미국인 소방관의 일생 The Life of an American Fireman>의 꿈꾸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1908에 시작된 것으로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화면을 나눠서 보여주는 것,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감독들이 만든 이미지의 병치와 다중 스크린 (예를 들어,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겹쳐진 이미지와 1972년 아벨 강스(Abel Gance)의 <나폴레옹 Napoleon>에서 세 부분으로 나뉜 스크린), 앞에서 말한 스크린 후면 프로젝션, 근거리와 원거리 장면을 병치하기 위한 딥 포커스 및 특수 합성 기법(예를 들면 <시민 케인 Citizen Kane>, <이반 대제 Ivan the Terrible>와 <이창 Rear Window>에서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인물)등을 들 수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03-204

어찌 되었든 그의 몽타주 이론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차원, 즉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각 차원에서의 변화를 조화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반대 시점(counterpoint)과 같은 여러 개의 원칙을 구성했다. 그가 고려했던 시각 차원의 예로는 그래픽 방향, 부피, 질량, 공간 그리고 대비가 있다. 유성영화가 가능해지자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원칙들을 확장해서 컴퓨터 언어로 말하자면, 시각과 가운드 트랙의 '연동화(synchronization)'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처리하려 했으며, 이후에는 여기에 색의 차원도 덧붙였다. 에이젠슈타인은 또한 여러 장면을 더 긴 시퀀스로 편집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일단의 다른 원칙도 개발하였다. '몽타주의 방법'의 예로는 '규칙성(beat)'을 만들어내도록 엄격하게 정해진 길이의 쇼트를 사용하는 계량식 몽타주, 쇼트 안 움직임의 유형에 기초하는 리듬 몽타주가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12

비록 디지털 합성이 일반적으로 이어붙인 흔적 없이 매끈한 가상이ㅡ 공간을 만들기 위해 쓰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다른 세계와의 경계가 꼭 없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공간이 원근법, 크기, 공간으로 합쳐지지 않고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다른 세계가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기 보다는 의미적으로 부딪힐 수도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14

동영상의 영역에서 스타일적 몽타주는 20세기에 사용된 여러 세대의 미디어 형식, 예를 들면 35밀리와 8밀리 필름, 아마추어와 전문가용 비디오, 초기 디지털 필름 형식이 모이는 장소로서 컴퓨터가 자리매김을 한 1990년대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과거에 영화작가는 영화 전체를 통해 대개 하나의 포맷만을 썻던 반면, 여러 아날로그 및 디지털 포맷의 대체가 가속화된 1970년대 이후, 뉴미디어 객체에서 스타일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일반화되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15

바르트는 전통적인 의미의 '작품'과 새로운 개념인 '텍스트'를 대비하고, 그에 대해 일곱 명제는 내세운다. 이 명제들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바르트의 '텍스트' 개념은 전통적인 미적 오브젝트, 즉 다른 객체와는 의미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르트는 전통적 개념을 견지한다. 그의 '텍스트' 개념은 여전히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미 '씌어진' 것을 '읽고' 있는 독자를 가정하고 있다. 요약하면 '텍스트'가 (바르트의 명제를 뉴미디어의 용어로 올기자면) 상호작용적이고 하이퍼텍스트적이며 배포되어진 역동적인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객체라는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21

첫번째 논문에서 사실주의는 현실의 현상학적인 속성에 근접하는 것 즉, "음향, 컬러, 입체감의 측면에서 외부 세계의 완전한 환영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논문에서 바쟁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자연적 시각의 지각적이고 인식적인 역동성에도 근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쟁에게 이러한 역동성은 시각적 현실에 대한 적극적 탐색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심도의 도입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이미지의 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사실주의를 향한 진일보였다고 해석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47

바쟁의 '관념적이고 진화론적인 설명에 반해서, 장 루이 코몰리는 영화 기술과 스타일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근본적으로 비선형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영화는, 코몰리에 의하면, "처음부터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이윤 창출에 대한 기대와 역사를 기술적, 미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결정론의 교차점으로 읽어야 한다고 코몰리는 제안하였다. -중략- 음향, 총천연색 필름, 색깔과 같은 새로운 기술적 발전은 관객에게 그 이전의 이미지가 얼마나 '비사실적'이었는지를 지적해주는 동시에, 현재의 이미지가 비록 더 사실적이기는 하지만, 미래에 비해서는 역시 쳐지는 것으로 끊임없이 거부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영화가 다른 시각매체와 하나의 구조 안에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각매체와 하나의 구조 안에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각매체의 변화하는 사실주의적 수준에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무렵에는 색조의 변화가 풍부해진 사진 이미지가 확산되면서 영화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거칠게 보였다. 따라서 영화산업은 사실주의의 기준을 따라가기 위해 총천연색 필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47-248

합성 이미지는 인간이나 카메라의 시각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무한한 해상도와 무한 차원의 세밀함을 지니기 때문이다. 합성 이미지는 심도라는, 렌즈에서는 불가피했던 결과를 벗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초점이 맞는다. 필름 물질과 인간 지각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잡티의 층인 입자성도 없다. 색은 채도가 더 높고, 이미지의 날카로운 선들은 기하학적 효율성을 따르고 있다. 인간의 시각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미지는 초사실적(寫實的)이다. 완전하게 사실적이다. 합성 이미지는 인간의 시각과는 다른, 더 완벽한 시각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그 시각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컴퓨터, 사이보그, 자동 미사일의 눈이다. 그것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완되고 잡티가 제거될 미래의 인간 시각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다. 또 그것은 디지털 그리드(Digital Grid)로 보는 눈이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66

이러한 테크닉을 수용한 가상 세계는 사용자의 행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 유동적인 세계이다. 사용자가 공간을 따라 돌아다니면, 객체는 단순한 청사진이 됐다가 완전히 구제화된 환영이 됐다가 한다. 주체가 가만히 있을 때는 완전한 환영이 보장되지만 약간만 움직이면 그 환영은 파괴되는 것이다. -중략- 무조건 상영시간 내내 환영의 지속이 유지되기를 추구하는 전통 영화나 사실주의 연극과 이 역동성을 비교해보라. 그러한 전체적인 사실주의에 비해서, 뉴미지어의 미학은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여러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수없이 차용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환영 생산 조건 드러내기'라는 전략은 이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자체 안에 끼워 넣어져 있다. 유사하게 발터 벤야민의 '한눈파는 상태에서의 지각'이라는 개념도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다. 기계가 주기적으로 재등장하고 메시지에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주체는 환영이라는 꿈의 세계에 너무 오랫동안 빠져들 수는 없고, 집중과 분리를 번갈아 경험한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72
 
디지털 이미지는 분리된 여러 개의 레리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레리어는 그만의 시각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제작과정에서 각 레이어를 따로따로 조작한다. 그들은 어떤 레이어를 지우기도 하고 새로운 레이어를 추가하기도 한다. 각 요소를 분리된 레이어로 보존하기 때문에 그것의 콘텐츠와 이미지 구성을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도록, 즉 배경을 지우고 인물을 다른 인물로 대체하고, 두 사람을 더 가깝게 밀착시키고, 대상물을 희미하게 만드는 등의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96

뉴미디어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범주들에 비중을 다르게 두어, 뒤쪽에 있던 것을 앞으로 내세우거나 아니면 앞의 것을 뒤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동이라는 또 다른 변화를 분석하면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했던 것처럼 "시대 간의 단절은 일반적으로 완전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여러 요소의 재구성을 수반한다. 이전 시대의 체계에서 종속적이었던 특징들이 지배적이 되고 특징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97  

통합체적 차원의 요소들은 현존(in present)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계열체적 차원의 요소들은 부재(in absence)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씌어진 한 문장의 경우 그것은 한 장의 조이 위에 물질적으로 현존하는 단어들로 되어 있지만, 이러한 단어들이 따르는 계열체적 집합은 오직 작가와 독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중략- 그러므로 통합체는 명시적(wxplicit)이고 계열체는 함축적(implicit)이며, 하나는 실재, 다른 하나는 상상의 것이다. -중략- 뉴미디어는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데이터베이스(계열체)는 실질적 존재로 주어지는 반면, 서사(통합체)는 탈물질화된다. 계열체가 우선시되는 반면 통합체는 무시된다. 계열체는 실재이고 통합체는 가상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298-299

우리는 촬영하는 동안 축적된 모든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촬영 스케쥴이 대개는 영화의 서사를 좇아가지 않고 제작 장소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편집을 하는 동안 편집자는 구성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영화라는 개념 송간에서 하나의 궤적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들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영화 서사를 구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영화제작자들은 어떤 영화를 만드는 경우이든, 데이터베이스와 서사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306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아마 현대 미디어 예술에서 데이터베이스 상상력에 관한 가장 중요한 예가 될 것이다. 그 영화에서 몇 번 반복되고 있는 핵심적인 한 장면에서 우리는 촬영된 자료를 보관하고 정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책장으로 가득 찬 편집실을 볼 수 있다. 그 책장들은 '기계', '클럽', '도시의 움직임', '신체의 움직임', '환영주의자'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기록된 자료의 데이터베이스인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308

<윈도우 쇼핑>이라는 책에서, 영화사학자 앤 프리드버그는 현대 영화, 텔레비젼 그리고 사이버 문화를 특징짓는 지각 방식의 고고학을 제시하고 있다. 프리드버스가 "동적 가상 응시(mobilized virtual gaze)"라고 부르는 그 방식은 두 조건을 결합한다. "재현을 통해 매개된 수동적 지각"과, "상상 속의 다른 장소와 상상 속의 다른 시간의 상상적인 배회"로 움직이는 것이 그 두 가지다." 프리드버그의 고고학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은 19세기의 새로운 가상적 재현 기술인 사진이 여행, 도시의 쇼핑 그리고 빈둥거리는 산책과 합쳐지면서 나타났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346-347

베르토프는 보들레르의 배회자와 오늘의 컴퓨터 사용자 사이의 중간에 서 있다. 더 이상 거리를 따라 걷는 보행자가 아니긴 하지만, 데이터 발굴의 알고리즘으로 무장하고 순수한 데이터 속으로 달려가는 깁슨의 데이터 카우보이는 아직 아닌 것이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349

19세기의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공간적인 내러티브는 20세기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니메이셔너럼 만화라는 서구 문화의 하위 형식에 그 권한을 위임하였다. -중략- 전통적인 영화와 비디오의 테크놀로지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완전하게 하나의 스크린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1970년대에 스크린이 메모리 위치에 상응하는 픽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역동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비트맵(bit-mapped) 방식의 컴퓨터 디스플레이로 되면서 하나의 이미지/하나의 스크린이라는 논리가 무너졌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403

서사가 스크린상의 다른 부분들을 활성화시키면, 시간적인 몽타주는 공간적인 몽타주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몽타주가 새로운 공간적인 차원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지의 내용, 구성과 움직임에서의 차이들과 같은) 몽타주의 차원이 영화에 의해서 이미 탐구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공간 안에서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미지들의 위치라는 새로운 차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서처럼 이미지들이 서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여주는 내내 스크린상에 남아 있기 때문에, 각각의 새로운 이미지가 바로 앞에 보인 이미지에만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스크린상에서 보이는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병치된다. 영화의 특성인 교체의 논리는 추가(addition)와 공존(coexistence)의 논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시간은 공간화되고 그크린 표면 위에 분산된다. 공간적 몽타주에서는 어떤 것도 잊혀질 필요가 없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404

벤야민의 지적대로, 20세기 초기의 영화는 클로즈업을 사용해서 "사물을 공간적으로 인간에게 '가깝게'가져오거나", "대상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잡아두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의 아우라를 파괴했다. 반면 부스타니의 디지털 합성은 사물을 그것들이 세상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로부터 "끌어내지"않고 감상자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뉴 미디어의 언어>. p.409


List of notable films using split sc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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