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가 발터 벤야민의 논의에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매체환경이 우리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의 이름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 복제시대를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이었기에 더더욱.
벤야민에 대한 관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는 데, 먼저 기술 조건의 변화가 인간의 지각의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이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매체 미학적 질문이 예술론적 차원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그는 사진과 영화의 미학적 본질이 20세기를 결정짓는 새로운 지각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예견했으며, 실제로 세계의 모습은 일종의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는데, 디지털이라는 오늘날 기술 조건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질문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벤야민적 사유 그 자체를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은 기술 복제시대의 지각방식을 논의하였고 그것이 품고 있는 정치적 변혁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진이나 영화에 대해 정치적, 사회적 기능을 부여하고, 이를 위해 이미지의 한계를 문자와 텍스트가 보완하리라는 기대는 오늘날 이미지의 시대와는 결정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본 논의는 크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먼저 <사진의 작은 역사> 전반부에 기술된 내용을 토대로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예술의 성격을, 나아가 인간의 지각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같은 에세이의 후반부를 통해 이 말없는 이미지를 어떻게 우리의 언어로 번역할 것인지 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진의 발명과 아우라
“찰나적 영상을 고정시키는 것은 철저한 독일의 연구결과가 말해 주듯, 불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이것을 해보려는 욕망자체가 이미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인간은 신의 모습 그대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기계도 신의 이미지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사진을 찍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기껏해야 신의 경지에 이른 인간만이, 그것도 일체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천상적 영감에 의해서 최고의 계시를 받는 순간 그의 천부적 재능의 높은 부름에 따라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재현시킬 엄두를 감히 낼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이다…….” - 1839년 독일 라이프치히 시보
사진의 발명일로 알려져 있는 1839년 8월 19일은 사진이 처음 발명된 날이 아니라, 니엡스이래로 존재해왔고 또 사용되어온 ‘사진’이란 매체가 프랑스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날이다. 오늘날로 치면 프랑스 정부가 사진이란 발명품에 특허를 내준 날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초기 사진역사에 있어 이 검은상자(camera obscura)의 등장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사진기 앞에 서 있으려 했으며 예술가들에게 역시 사진은 풍경화와 초상화를 위한 밑그림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예외적이라면 사진에 대한 정부의 특허권을 주장했던 물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라고(Arago)만이 유일했는데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힘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진은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탁월한 매체였으며 천체 물리학에서부터 문헌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능력을 지닌 도구였다.
그렇다면 조금 더 자세하게 사진의 초기 형태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초창기 사진이 대중과 조응할 수 없는 이유이며 동시에 벤야민이 발견했던 가능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초기 역사에 있어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다게레오 타입(은판사진)은 이 방법을 고안해낸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인화법이다. 상(像)을 만들어내기 위해 은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인화하는 이 방식은 필름이라는 중간과정이 생략된 직접 양화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만들어진 은판사진은 복제가 불가능한 단 하나의 원본이 된다. 오늘날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운데, 이러한 면에서 벤야민의 텍스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하는 사진과는 복제성 여부에서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게레오 타입은 당시 발명된 다른 사진기법에 비해 선명하고 뚜렷한 인물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은판의 비싼 가격 그리고 장시간 촬영이라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일부 귀족계층이나 초기 부르주아지들의 초상화를 위한 대체물로 이용되는 정도로 그쳤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사진이 아우라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사진에 관한 벤야민의 테제에도 불구하고 초기 초상 사진에선 오히려 형용하기 힘든 분위기, 즉 아우라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벤야민 역시 데이비드 힐의 사진 분석을 통해 이를 인정하고 있는데 <뉴헤이븐의 어부의 아내>라는 사진에서 그는 ‘한 때 살았지만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결코 ‘예술’ 속에는 완전히 병합되지 않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러한 아우라의 체험은 기묘한 시간성의 병치로부터 기인한다. 대상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부재하고 있음을 확증하는 초상사진의 특성이 일종의 환상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는 ‘여기와 옛날 사이의 비논리적인 결합’에서 비롯되는 마법적이고 무의지적인 체험이 푼크툼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벤야민 역시 무의지적 체험에 주목했는데 그는 또 다른 사진 <칼 다우텐다이 부처>의 사진 속에 드러난 한 순간에서 이러한 무의식의 폭로, 즉 흘러가버린 순간의 평범함 속에서 미래적인 사건을 예고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이러한 무의식의 폭로는 당시 사진의 기술적 조건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랜 노출을 필요로 했던 당시의 은판 사진은 피사체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알게 모르게 무의식은 사진 위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오를릭은 이를 두고 ‘이러한 사진이 지니는 단순성이 마치 잘 그려진 소묘나 초상화처럼, 뒷날의 사진들보다 보는 사람들에게 훨씬 직접적이고 오래 가는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모델을 오랫동안 부동 상태로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그 사진이 얻게 된 표현의 종합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를릭이 말하는 ‘종합’의 의미이다. 그에게 종합이란 시간의 지속성을 통해 응축된 표현의 총체 이자 특이한 매질이며 시간성 그 자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진의 표면에는 일종의 아우라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벤야민이 주목했던 초기 사진의 아우라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복제가 불가능한 은판사진 원본의 아우라. 둘째, 대상이 품고 있는 시간의 아우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노출이 만들어낸 지속성의 아우라로서 말이다.
3. 사진의 대중화와 두 명의 사진가 : 으젠 앗제와 아우구스트 잔더
그러나 19세기 말, 대물렌즈라는 새로운 집광 기술의 등장하며 사진의 수용 방식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자기현시의 대중적 열망과 결합한 기술적 진보는 초상사진 열풍을 만들어냈고 직업사진사의 자리엔 도처에서 장사꾼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타락과 비견할만한 아우라의 붕괴였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아류의 화가들이 사진에 복수라도 하듯이 음화수정이라는 것을 보편화시켰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취미는 상업화로 변질되었다. 조잡한 수준의 사진첩이 유행하였으며 과거의 초상사진을 따라하는 부자연스러운 포즈가 대세를 이루었다.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초상사진은 사진역사 초기의 초상 사진을 그대로 답습하려 들 뿐이었다. 사실 이러한 포즈의 부자연스러움은 초상사진의 주요 고객이 된 부르주아지들의 몰 개성화, 비주체화와 맞물려 있었다. 제국주의적 확장과 상업자본과의 결탁을 통해 성장한 시민계급이야말로 익명성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름 없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연출하라는 사진의 요구야말로 자기 소외를 들어내는 가장 적절한 주문이 되었던 셈이다. 사진사들은 수정기술과 고무판의 이용 그리고 인위적인 반사광선을 군데군데 비추는 것으로 사라져버린 아우라를 조작해내려 했으며 이것은 성장한 시민계급의 욕망과 부합하며 일대의 유행이 되었다. 어린 카프카의 사진은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준다. 벤야민은 말한다. 이러한 박제화 된 열대풍경을 배경으로 서있는 한 소년의 우수에 젖은 표정이야 마치 기술적 진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감의 또 다른 은유라고.
그렇지만 사진술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사진사가 그의 기술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인 만큼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자신만의 것으로 성취해 낸 사진가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벤야민은 사라져버린 아우라를 복원하려는 조잡한 시도들 속에서 최초로 사진을 탈 주술화, 탈 아우라화 최초로 성취해 낸 이로 으젠 앗제를 지목한다. 이유는 그가 초상사진이라는 제의적 가치의 사진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사진가 으젠 앗제는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의 파리와 파리의 주변 모습들을 약 4천여 점의 사진들로 남겨놓았는데, 그의 사진들은 당시로선 매우 보기 드문 파리의 풍경이었다. 이국적이거나 낭만적인 대상 대신 간략한 도시이름의 표제가 붙은 난간의 한 부분, 방화벽, 텅 빈 거리의 모습이 전부였다. 파리가 지닌 낭만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대상으로부터 그것의 표피는 제거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앗제의 사진을 제일 먼저 알아본 이들이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들은 앗제의 사진을 자신들의 잡지 <비푸르 Bifur>나 <바리에떼 Variete>에 싣곤 했는데 그들이 보기엔 앗제가 그려낸 파리의 풍경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지향하는 현실의 생경한 풍경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진들은 정치적으로 훈련된 시각의 장을 깨고 오히려 생생하고 살아있는 세부의 감각을 일깨웠으며, 순간의 포착을 통해서 무의식의 층위를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더더욱 초현실적이었다.
벤야민 또한 앗제 사진의 가장 중요한 효과로서 소격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소격을 통해, 낯익은 것이 모두 탈락하고 따라서 사진이 결정적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초현실적인 현실인식이 어떻게 혁명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며 이는 벤야민의 또 다른 텍스트 <초현실주의> 논문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벤야민의 초현실주의론에 따르면 진정한 혁명의식이란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성찰 또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집단적 차원에서 촉각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깨달음이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건축물을 온 몸으로 체험했을 때 비로소 건축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이루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현실의 집단적 체험이라는 점에선 또 한 명의 사진가를 거론할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이다. 아우구스트 잔더는 1933년 <우리시대의 얼굴>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게 되는데, 이 사진집에서 잔더는 1910년대에서 50년대까지의 독일인들을 직업별, 계층별, 연령별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다. 독일의 소설가 되블린은 잔더의 사진을 두고 ‘마치 비교해부학을 통해 비로소 자연의 질서를 가늠하게 되는 것 처럼 잔더의 사진은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비교 사진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가 가능했던 것은 계급과 계층의 신화를 부정하고 오직 객관적 관찰과 엄정한 기록을 추구했던 잔더의 작업방식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아우구스트 잔더의 작업을 사회적 전형을 근거로 한 인종학적 분류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상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수한 의미를 가진 ‘가면의 사진’은 사회에 불안을 주기에 충분할 만큼 비판적이지만 한편 그 사진이 효과적인 사회 비판을 진정으로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동시에 우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벤야민은 오히려 집단적 표상을 개인의 관찰력을 통해 발견하려한 잔더의 경험적 태도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것은 마치 괴테가 ‘자신을 대상과 긴밀하게 일치시킴으로서 그 자체가 스스로 이론이 되는 그러한 섬세한 경험적 세계’를 주장했던 것과 같은 태도였던 셈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잔더의 과학적 사진이야말로 경험과 역사의식을 연결시키려 했던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일맥상통하는 기획이었다.
4. 예술과 사진 그리고 현실
문제는 이러한 예술로서의 사진 이후의 세계였다. 앗제와 잔더 같은 일군의 창조적인 사진조차 사회적, 상업적인 제반 상관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일종의 물신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말았다는 점은 벤야민에겐 뼈아픈 현실이었다. 마치 통조림통을 모아서 하나의 세계를 조립해 냈지만, 여전히 통조림통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적 연관관계의 그 무엇도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벤야민은 이러한 물신화의 대응전략으로 ‘폭로와 구성’을 내세웠다. 브레히트가 말한 대로 상황이 너무나 복잡해졌기 때문에 단순한 현실의 재현은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찍은 사진들이 조직과 계급의 모순을 밝혀줄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벤야민은 이러한 물화된 인간관계를 폭로하기 위해 그리고 무언가 인위적으로 조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현실의 구성적 인식을 제안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생경함을 창출하는 조립의 원칙을 근간으로 해서 말이다. 벤야민에게 그것은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의 몽타주였고 독일 구성주의 사진의 폭로 전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전략이 매우 언어적인 논리위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몽타주의 충돌을 읽어내는 능력도, 구성주의 사진이 취하고 있는 프로파간다의 전략 모두 문자적이고 언어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벤야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진의 텍스트, 소위 오늘날의 캡션이라고 부르는 표제에 대한 강조는 그리 새로운 지적이 아니다. 심지어 벤야민은 앗제의 사진이 표제가 없다면 범죄 현장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면, 그가 지지했던 사진의 가치를 텍스트에 의존하는 태도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표제에 대한 벤야민의 인식이 단순히 표제의 설명적 기능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표제를 강조하는 벤야민의 태도는 더 이상 사진이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임에 대한 선언이다. 앞서 벤야민이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 속에서 집단적 표상과 더불어 함몰된 개인의 정체성을 읽어냈으며, 나아가 앗제의 사진 속에서 탈 인간화, 탈 아우라의 세계를 읽어낼 것을 요청한 것 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선 이들의 사진 역시 이미지의 도취로 빠져버린 채 물신주의의 덫에 걸려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치 미술사적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이 저 하얀 벽으로 둘러쌓인 갤러리에서 안주했던 것 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말하고 있다.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누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영상을 읽을 줄 모르는 사진가 또한 이에 못지 않는 문맹자이다.”라고.
-------------------------
참고문헌 (가나다순)
박주석. <사진 이야기>. 눈빛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한정식 옮김. 열화당
롤랑 바르트. <이미지와 텍스트>. 김인식 옮김. 세계사
필립 뒤봐. <사진적 행위>. 이경률 옮김. 마실가







학교 선배가 기획한 영화제 



![[수입] Michigan](http://image.aladdin.co.kr/coveretc/music/coveroff/2732436329_1.jpg)

![[수입] Misery Is A Butterfly](http://image.aladdin.co.kr/coveretc/music/coveroff/2882436521_1.jpg)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