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심보선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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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캐독고랭보 2009/07/18 19:34 # 삭제 답글

    낮빛 탁해지며 낄낄 거리며 읽을수 있는 시이지요,
    심보선의 묘미.
  • blackmoon 2009/07/25 15:57 # 답글

    To. 캐독고랭보
    누님의 결혼식을 보러 미국에 가면서 왜 하필 이 책을 가져갔었는지...허허..
    하긴 저희 누님은 예전에 남자친구를 문병가면서 남진우의 시집을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엽기적인 남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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